이케다 나리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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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케다 나리마사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로, 오카야마 번의 11대 번주이다. 1773년에 태어나 1794년에 아버지의 은거로 가문을 계승했으며, 재정 개혁과 문화 진흥을 통해 번정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사쓰마 번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차남을 양자로 들여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183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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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나리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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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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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이케다 씨 (이케다 데루마사 류) |
통칭 | 신주로(新十郎) |
초명 | 마사히사(政久) |
휘 | 나리마사(斉政) |
계명 | 간코쿠인덴사이가쿠소슈다이코지(観国院殿西嶽宗周大居士) |
묘소 | 오카야마현오카야마시나카구 엔야마의 소겐지 내 이케다 가문 묘소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출생 | 안에이 2년 음력 4월 8일(1773년5월 28일) |
사망 | 덴포 4년 음력 6월 26일(1833년8월 11일)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
관직명 | 가즈사노스케 좌근위권소장 |
정치 경력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나리 |
번 | 비젠오카야마번 번주 |
가족 관계 | |
부모 | 아버지: 이케다 하루마사, 어머니: 사카이 다다토모 딸 미히메 |
형제 | 마사야스, 마사요시, 호리 나오하루, 하루히메, 가네코, 사노 시게요시 정실 |
배우자 | 이케다 시게히로 딸 이토코 |
자녀 | 나루테루, 유센인, 가네코, 에이히메, 나리시게(양자), 나루토시(양자) |
기타 정보 |
2. 생애
안영 2년 (1773년) 4월 8일, 제5대 번주 이케다 하루마사의 차남으로 에도 번저에서 태어났다. 서출인 형 이케다 마사야스가 있었으나, 정실 소생이었기에 장남으로 신고되었다.[1] 간세이 6년 (1794년) 아버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편휘를 받아 이름을 '''나리마사'''(斉政)로 바꾸었다.
번주가 된 후에는 아버지 시대의 방만한 재정을 바로잡기 위해 예산 제도 도입과 지출 제한 등 검약 재정을 추진하여 번 재정 회복에 힘썼다. 또한 문화 진흥과 인재 등용에도 관심을 기울여 번정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분세이 2년 (1819년) 적자 이케다 나루테루가 요절하고, 이듬해에는 손자마저 사망했다. 동생의 아들 이케다 나리시게를 사위 양자로 삼았으나 그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여러 차례 후계자를 잃은 후,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차남 이케다 나리토시를 새로운 사위 양자로 맞이했다.
분세이 12년 (1829년) 2월 7일, 양자인 나리토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덴포 4년 (1833년) 6월 26일, 오카야마 성 서쪽의 마루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안영 2년 (1773년) 4월 8일, 제5대 번주 이케다 하루마사의 차남으로 에도 번저에서 태어났다. 서출인 형 이케다 마사야스가 있었으나, 정실 소생이었기 때문에 장남으로 신고되었다.[1] 간세이 2년 (1790년)에 원복을 치렀다. 간세이 6년 (1794년) 3월 8일, 아버지 하루마사가 은거하자 그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이때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편휘(이름 한 글자)를 받아 원래 이름인 '''마사히사'''(政久)에서 '''나리마사'''(斉政)로 개명했다.아버지 하루마사 시대의 방만한 재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직책에 맞는 예산 제도를 도입하고 지출을 제한하는 등 검소한 재정 운영을 통해 번의 재정 회복을 꾀했다. 또한, 문화 진흥과 유능한 인재 등용에도 힘써 번정을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연도 | 사건 | 내용 |
---|---|---|
분세이 2년 (1819년) | 적자 사망 | 적자인 이케다 나루테루가 2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분세이 3년 (1820년) | 손자 사망 | 나루테루의 장남 혼노조(本之丞)마저 5세로 사망했다. |
날짜 미상 | 첫 번째 양자 입양 | 동생 이케다 마사요시의 장남 이케다 나리시게를 사위 양자로 맞이했다. |
분세이 9년 (1826년) 8월 | 양자 사망 | 사위 양자 나리시게가 18세로 사망했다. |
분세이 9년 (1826년) | 막부 제안 거절 | 에도 막부로부터 쇼군 이에나리의 자녀를 양자로 맞이하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
분세이 9년 (1826년) 10월 | 두 번째 양자 입양 |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차남 이케다 나리토시(훗날 타메마사(為政), 나리토시(斉敏)로 개명, 돗토리 번주 이케다 하루미치의 손자)를 새로운 사위 양자로 맞이했다. |
분세이 12년 (1829년) 2월 7일, 가독을 양자인 나리토시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
덴포 4년 (1833년) 6월 26일, 오카야마 성 서쪽의 마루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
2. 2. 번정 개혁
아버지 이케다 하루마사 시대의 방만한 재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직책에 맞는 예산 제도를 도입하고 지출을 제한하는 등 검약 재정을 단행하여 번 재정의 회복을 꾀했다. 또한, 문화 진흥과 유능한 인재 등용에도 힘써 번의 운영을 어느 정도 재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2. 3. 후계 문제
분세이 2년(1819년), 적자인 이케다 나루테루가 2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분세이 3년(1820년)에는 나루테루의 장남이자 나리마사의 손자인 혼노조마저 5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후계자가 연이어 사망하자, 나리마사는 동생 이케다 마사요시의 장남 이케다 나리시게를 사위로 삼아 양자로 들였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분세이 9년(1826년) 8월, 나리시게 역시 1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잇따른 후계자들의 죽음으로 후계 문제가 심각해지자,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자신의 자녀 중 한 명을 나리마사의 양자로 보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나리마사는 이를 거절하고, 같은 해 10월 사쓰마 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둘째 아들인 이케다 나리토시(훗날 타메마사, 나리토시로 개명, 돗토리 번주 이케다 하루미치의 손자)를 새로운 사위 양자로 맞이했다.
분세이 12년(1829년) 2월 7일, 나리마사는 마침내 나리토시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2. 4. 사망
덴포 4년 (1833년) 6월 26일, 오카야마 성 서쪽의 마루에서 사망했다. 향년 61세.3. 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이케다 하루마사 | (1750년 - 1819년) |
어머니 | 요네히메 (호다인) | 사카이 타다요리의 딸 |
정실 | 시코 (이토코) | 이케다 시게히로의 딸 |
장남 (정실 소생) | 이케다 나리아키 | (1797년 - 1819년) |
딸 (정실 소생) | 유센인 | 야마우치 토요스케의 정실 |
측실 | 이소노 | |
차녀 (측실 소생) | 카네코 | 이케다 나리시게의 정실, 후에 이케다 나리아키라의 정실 |
딸 (측실 소생) | 에이키 | 마츠다이라 나리카타의 계실 |
양자 | 이케다 나리시게 | (1809년 - 1826년) - 이케다 마사요시 (이케다 하루마사의 삼남)의 장남 |
양자 | 이케다 나리아키라 | (1811년 - 1842년) -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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